희주는 나긋한 곡선을 그리는 태자궁의 처마 아래에서 비로소 봄을 알았다. 길 위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다 하나 수도로 출발하기 전 조趙는 더할 말도 없이 겨울이었으니 태자궁 정원의 이 봄은 무르익어 만연했다 하나 희주에게는 올해의 첫 계절인 셈이다. 기다리는 동안 객실로 안내하여 차를 올리겠다는 공공의 대접을 마다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눈에 익은 취향으로 피어난 기화요초와 아름답게 관리된 전각 사이를 잠시 거닐고 있자니 왕제王弟 희안이 허겁지겁 다가와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형."
"그래, 오랜만이다. 어떤 일로 와 있었느냐."
"영지에 계시는 동안 오래 격조하였지 않습니까. 뵙고 인사를 올리고 싶어서 기다렸습니다."
희주는 다른 말을 붙이지 않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조왕이 태자궁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이각 전에 태자의 대전으로 들어갔을 것이나, 태자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다. 희안이 희주의 표정을 살피더니, 주변을 둘러보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태자 형님께서 오늘 보자 이르신 이유는 왕형의 혼사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지요?"
"그 일을 너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희주가 난 화분 앞에서 멈추어 섰다.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르던 희안이 형의 어깨 너머로 화분을 살폈다. 잎이 뻗은 모양이 풍아하고, 피어난 꽃에 흠이 없는 것으로 보아 희주가 아끼던 것을 영지로 향하기 전에 태자궁에 보내 맡긴 것이다.
"아우가 듣기를, 그 댁 소저는 온화하고 심성이 고우며 학식이 높다 하니 왕형의 왕비로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너는 그간 학문을 닦는 것에는 전혀 힘을 쓰지 않고 관가와 규방의 소문에나 열중한 모양이지."
"조왕 전하, 육황자 전하."
머쓱해진 희안이 변명처럼 무어라 대답하려는데, 공공이 와 형제에게 차례로 허리를 숙여 보였다. 못 본 사이에 제법 의젓해져 황자의 풍격을 갖춘 희안이 인사를 받았다. 공공이 희주를 향해 다시 한번 허리를 깊숙하게 숙였다.
"태자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아, 그럼 아우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희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희안은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실상 조에 두고 온 왕부보다도 지리에 익숙한 곳이 이 태자궁이었지만, 안내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희주는 안부 올릴 말들을 몇 세다가 곧 그만두었다. 궁인 여럿이 예를 올리고, 조왕이 이르렀음을 고했다.
"태자 형님을 뵙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지. 앉아라."
희주는 대전에 앉은 태자에게 인사를 올리고, 늘 앉던 대로 오른편의 자리에 앉았다. 형제의 앞에 술상이 차려졌다. 금 앞에 앉은 악사가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섯 줄 현을 퉁기는 소리가 들렸다.
"조왕은 어려서부터 소리를 아꼈지. 조의 풍속과 예악이 유순하고 어질다 하나 어디 성도에서 듣던 것에 비하겠느냐. 하여 특별히 이 자리에 악사를 불러 함께하도록 하였다."
"혼사를,"
"급히 이야기할 것 없구나."
태자는 손을 가볍게 저었다. 시중 드는 궁인이 각각 허리를 숙여 태자와 희주의 잔을 채웠다. 태자가 이렇게 나오는 상황에 더 보챌 수도 없는 노릇이라, 희주는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고 술잔을 비웠다. 태자는 연주보다는 가무에 흥취를 가지고 있었으니 오늘은 분명 희주를 위해 준비한 것이 맞았다. 그러니 마땅히 어울려 즐기는 것이 도리이건만, 제아무리 훌륭한 연주라 한들 술상 위에 달갑지 않은 용건이 놓여 있으니 귀에 들릴 리 없다.
희주가 아무 말 없이 술잔만을 비우고 있으니 태자도 흥이 나지 않는 듯했다. 악공이 한 곡을 마치자 태자는 손을 저어 악공을 물렸다. 텅 비워진 대전에 쓸쓸한 침묵만이 남았다.
"사황자가 명년 봄에 성혼한다는구나."
"······."
"상대는 승상부의 소저라지. 승상부에는 자제가 하나뿐이니, 출사하여 후사를 준비시킬 줄로 알았는데 아무래도 삼황자에게 거는 기대가 큰 모양이다."
부황에게는 여인이 많았고, 그 여인들에게서 본 자식도 많았다. 황후에게서 난 태자와 이황자 희주를 제외하고도 귀비 소생의 삼황자와 사황자, 일황녀가 있었고 여타 비빈과 잉첩들에게서 난 자식을 헤아려 세는 것도 수고로웠다. 사대부의 가법과 제왕의 가법이 달라 한 나무에 알 굵은 열매가 여럿 번성하는 것은 모쪼록 반길 일만은 되지 않는 법이다. 허나 부황은 첫 아이를 당시 정궁 태자비였던 황후와의 사이에서 보았고, 제위에 오르자마자 태자로 세웠으니 전례에 비추어도 흠 잡을 곳이 없었고, 황후는 마땅한 법도로 후궁의 기강을 엄히 다스렸으니 궁의 담장 안에는 불화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황후가 돌연 붕어하며 그 질서와 질서 위에 얹혀 있던 평화가 깨졌다. 안온했던 나날은 깨진 기왓장처럼 발아래에서 무너졌다. 황후가 살아생전 생산한 두 황자가 모후를 잃었을 때 태자는 아직 관도 머리에 얹지 않은 열여섯, 동복 아우인 이황자 희주는 겨우 열둘. 당시 태자는 전조의 명분이나 적장자의 권위 따위를 손에 쥐고 어떻게든 제 살길을 찾아 스스로 뜻을 펼 수 있었으나, 모후가 직접 휘諱를 골라 지었을 만큼 귀애하던 둘째 아드님은 뱀 같은 후궁들과 들개 같은 신하들 사이에 내던져지기에는 너무 어렸다.
"······상을 치러요, 형님."
"빈전 밖으로 나오지 마라. 누가 불러도 응하지 말고, 주는 것을 받아 먹거나 입지도 마라. 호곡하다 곧 숨이 넘어갈 것 같거든 차라리 그렇게 해라."
태자는 아직 영문 모르는 얼굴을 한 아우의 어깨를 꽉 틀어쥐었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
태자는 옛 성현에 비견할 만한 문재나 기예를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총명하고 셈이 빨랐다. 과연 계책이 제 몫을 하여 그들 형제는 그해 겨울을 살아남았다. 그다음 해도, 그 이듬해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목숨을 건졌다. 희주가 시묘살이를 마치고 몸에 밴 향냄새를 채 씻어내지도 못한 채로 돌아왔을 때 부황은 이황자를 크게 칭찬하며 조왕에 봉했다. 태자가 그의 곁에 있었다.
바로 아래의 아우인 희주와, 비록 빌어 난 배는 다르나 모후가 거두어 아들로 기른 희안까지. 태자는 친히 자신의 안위를 걸고 나이 어린 소년과 제대로 걸음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의 뒤를 돌보았고 희주가 소년이 되자 장계를 논하는 자리에 불러 앉혔다. 위세 당당한 조왕, 세상에 알려지기를 옥을 깎은 듯 빼어나다는 이황자 희주의 모든 것은 태자가 이루고 가르친 것이다. 아버지의 은혜를 입었으나 자식이 아니니, 도리를 안다면 마땅히 보은해야 한다.
"당장 성혼은 않더라도 자리를 마련한 성의를 보아 선은 보는 것이 좋겠다.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느냐."
"······예, 그리하겠습니다."
희주는 고개를 숙여 순응의 뜻을 표했다. 태자는 소리내어 웃으며 친히 희주의 앉은 자리로 내려와 잔을 채워주었다. 태자가 잔을 들었다. 희주가 잔을 받잡아 예를 표했다. 몇 잔 순배가 돌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붉어진 태자가 상석 의자의 팔걸이에 몸을 기울이며 친근히 말을 붙였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라. 왕비의 자리를 비워 둘 수는 없으니 어차피 치러야 할 혼인이 아니냐. 모후께서도 이날 이 자리에 계셨다면 분명 기뻐하셨을 것이다."
"그렇습니까."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태자가 모후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릴 때면 희주는 언제나 낯선 기분이 들었다. 허나 그럴 수밖에, 목련꽃 가득한 황후전의 뒤켠에서 철없이 뛰어놀던 소년이 가까스로 살핀 심기보다, 제법 사리를 헤아릴 줄 아는 열여섯 살이 기억하고 간직하는 뜻이 분명하리라. 모후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을 때 겨우 열두 살이었으니, 모후의 기억만을 가지고 살아온 나날이 직접 문안 올렸던 날보다도 길다. 희주는 그저 그렇게 생각해 두기로 하며, 오래된 기억을 저편에 묻어 둔 채로 술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