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을 앞두고 봉림공주가 아우 연왕을 위문하고자 변경 연왕부에 친림한다는 소식이 갓 전해졌을 때 젊은 연왕은 지체 없이 접객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할 것을 명했다. 따라 연왕부는 전에 없이 분주한 나날을 맞고 있었다. 실상 수도에서 갓 올라온 연왕을 맞아들였을 때도 이리 온 왕부가 바쁘지는 아니하였던 것 같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수 년 전에는 막내 황녀 이재가 왕작을 받았다는 소식이 변경에 채 가 닿기도 전에 연왕의 기마와 수레가 성문 앞에 도달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봉림공주의 내방은 그리 주먹구구식으로 넘어갈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봉림공주는 율법으로나 인망으로나 다음 제위의 주인으로 유력하게 거론되어 왔고, 이곳 연의 제후 이재의의 이복 형님이었으며, 왕부가 처음으로 맞는 본성의 손님이었다. 동복 형제로 봉림공주와 더불어 왕위를 겨루는 봉호공주와 그녀의 든든한 우군인 노왕이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척박한 연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내 파발이 도착한 날, 연왕은 친히 말 위에 올라 가마를 거느리고 성문 바깥으로 백 리를 나섰다. 녹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은 금군의 행렬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연왕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몰아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일행의 선두가 말머리를 멈추고 행렬을 뒤로 물리며 말에서 내려 절했다. 연왕은 그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붉은 주단으로 덮은 가마를 찾으려다가, 백 리 밖에서도 능히 알아볼 수 있는 그 가마가 보이지 않자 눈을 둥그렇게 뜨며 선두의 비연에게 말을 붙였다.

  "형님께서는?"

  "인근의 성주에게 곡식과 위문품을 전달하시고자 행렬을 앞세워 보내셨습니다."

  "아."

  연왕-이재는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봉림공주 기령은 오랫동안 구휼에 앞장서거나 변경의 장수들에게 위문품을 하사하는 일을 해 왔기에, 더 부연할 필요도 없다. 이재는 비연을 향해 손짓했다. 비연이 다시 말에 올랐다.

  "됐어. 적당히 들어가자."

  이재는 말머리를 돌리며 의례적으로 공주 행렬을 크게 돌아보다가 눈을 번쩍 떴다.

  "어어, 당신은."

  '저요?' 갑자기 주군의 아우 겸 연왕 되는 사람에게 지목당한 붉은 머리 수행원이 당황한 기색으로 인상을 찡그렸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재는 비연을 위시하여 기령의 충복 대부분과 어느 정도의 안면이 있었다. 헌데 저쪽은 익은 듯 익지 않은 얼굴인 것이다. 기억을 되짚으니 사냥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소나기를 피했던 객잔에서 한 번 보았던 얼굴이다. 교자의 맛이 궐에서 먹던 것보다도 뛰어나 여태껏 기억하고 있었다.

  골몰 중인 연왕의 얼굴을 법도의 미진함에 대한 지적으로 이해하였는지 로진은 허리를 더 푹 숙였다. 이재는 인사를 대충 받아 넘기고 로진을 가리켰다가, 그 손가락으로 다시 비연을 가리켰다.

  "요리사야?"

  "새로 들어온 금군입니다, 전하."

  "그런 재주가 있었다고?"

  비연은 로진을 바라보았고, 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는 다시 비연에게 눈짓해 보이며 말고삐를 틀어쥐고 몸을 돌렸다.

  "너, 교자 맛있었어. 나중에 가서 만들어 줘."

  "로진은 공주 마마를 시위하여 온 것이지 요리사로 따라온 것이 아닙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비연은 맥이 탁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변경에서 보낸 지난 몇 해간 기골이 장대해져 먼발치에서 말에 오른 모습을 보았을 때는 그 기상이 제법 늠름하였으나, 얼굴을 마주보고 몇 마디 섞으니 요만하던 소년에서 달라진 것이 없다.

  백릿길이라고 하나 연왕부까지는 길이 탄탄하게 닦여 있었기에 이제껏 걸음한 여정에 비해 고생이라고도 할 수 없는 거리였다. 연왕부의 하인들이 공주의 의복이나 물건 따위를 실은 궤를 처소로 모셨고, 집사들이 공주가 수레에 실어 온 곡식 자루와 향기 나는 기름과 술병 따위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일들이 맞아떨어져 가는 것을 확인한 비연은 차 한 잔 대접해 주십사 연왕을 서재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재의 서재는 물론 아주 깨끗하고 소박했다. 이제 간혹 수도에서 올라오는 공주의 서한에 적힌 글월을 제외하면 글 읽는 것을 강제하는 이도 없을 테니 익히 알 만하다. 계집종이 들어와 차 시중을 들었다. 향기로운 김이 서린 다완을 매만지던 비연은 종이 떠나자마자 말문을 열었다.

  "주군께서 왕부에 이르시기 전에 긴히 고할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봐."

  비연은 적당히 무례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이재의 귓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어린 시절부터 알아 왔고, 이재 본인이 이런저런 법도 같은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지내는 이라 적당히 처신해도 상관 없었다.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듣던 이재는 비연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펄쩍 뛰다가 찻물을 엎을 뻔했다.

  "뭐? 정인? 그런 게 있었다면 어째서 이 아우에게 알리지 않은 거지?"

  "끝까지 들으세요, 전하."

  그래서 비연이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얼마 전에 수도에서 큰 변이 있었다. 시작은 몇몇 문인들이 모여 금이나 뜯고 글월이나 읽는 모임이었는데, 황후를 박대하고 육궁을 가까이하여 치세를 망조로 이끌었던 옛 군주의 부덕을 탓하는 시를 썼던 것이 화근이 되어 한 세가가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기령을 겨냥한 계략이었고, 기령은 대신 죄를 쓰겠다고 나선 정인을 구명하지 못하여 독을 삼키는 마음으로 비밀리에 교유하여 오던 제 사람들이 부황의 칼날 아래 유명을 달리하는 것을 지켜보았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 시기가 상강 직전으로, 얼마간 먹고 마시는 것을 잊었던 기령은 기운을 차리자마자 이재에게 서신을 띄우고, 휴양과 위문을 명목삼아 연으로 떠나온 것이다. 

  "차마 서한에 담아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해해. 그러니 다 큰형님이 사주한 일이었다는 말이지."

  "금군이 은자의 출처를 추적하였는데 봉호공주 마마의 사저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마마님이니 뭐니 하며 높여 부르고 싶지도 않은데 웃전에다 그 아우 되는 사람 앞이라 어쩔 수 없이 그리 부른다는 투다. 비록 난 태가 다르다 하나 동기간인데, 부황을 닮아 새까만 머리카락에다 쭉 찢어진 푸른 눈이 얄미운 봉호공주는 기령이 연으로 떠나는 것을 알고 축배를 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봉호공주와 여기 이재는 친동기간인데도 하나도 닮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도, 눈빛도 다른 기령과 닮은 구석을 더 많이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이재는 느슨한 자세로 턱을 괴고 한 마디로 일축했다. 

  "연이 휴양할 만한 곳은 아닐 텐데. 어떻게 해야 기분이 좀 나아지시려나."

  "그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재롱이라도 떨까?"

  "재롱이라고요?"

  아무리 열 살 가까운 터울에 업혀 자랐다고 해도 그게 되겠습니까. 비연은 그 뻔뻔함에 입을 딱 벌리고 고개를 내저었고, 이재는 교자 얘기나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일단락된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 뒤 파발이 봉림공주가 근처에 당도하였음을 알린 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