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령은 돌로 쌓은 성을 눈에 담았다. 손끝에 저며 오는 한기가 시렸다. 차가운 성벽 너머 펼쳐진 하늘은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흐렸다. 꼭 부옇게 일어난 종이 같다, 기령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 하늘 위에 새겨지는 것은 담비 털을 모아 만든 붓으로 섬세한 선을 그려낸 화조도 따위가 아니라 전장의 풍경일 것이다. 두꺼운 붓에 담묵을 흠뻑 적셔 기마와 군세를 그리니, 윤곽이 무너져 관군과 오랑캐의 무리가 어지럽게 뒤섞인다.

  "형님, 눈발이 들이치니 어서 들어오시오."

  기령은 피백 위에 떨어진 눈송이를 내려다보았다. 채 유시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워진 하늘에서는 어느덧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자색 장포를 걸친 이재가 아래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기령은 시중을 받아 망루에서 내려섰다.

   이재는 수도에 왕부를 두지 않았다. 왕부로 분가하기 이전에는 궐 안에 살았고, 왕작을 받자마자 지체없이 봉읍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변경의 연왕부는 비어 있던 성을 고쳐 증축한 것으로 단순하고 투박했다. 그 성정에 전각이나 후원 같은 것을 일부러 꾸며 둘 리가 없고, 거칠게 깎여 일정치 못한 격자무늬나 낡아 얼룩진 장식 따위가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실상 왕부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모양새다. 그러나 돌로 지은 벽 안에는 훈풍이 돌았고, 정방의 거실은 아주 따뜻하게 데워져 손님을 맞기에 걸맞았다.

  이재는 직접 뜨겁게 데운 술을 잔에 따라 기령에게 올리고, 대접에 제 몫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향이 강한 백주다. 한 모금 마신 기령이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훌륭한 것이나, 기령이 평상시에 가까이하며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금방 몸이 데워지며 후끈하게 열이 오른다.

  "본래 이리 날이 춥더냐."

  "올해 겨울이 유난히 혹독합니다. 영공의 말로는 입동이 지나지 않아 눈이 내리는 것은 이곳에서도 드문 일이라 하더군요."

  "버티는 것만으로 족하지 않겠구나. 돌아가면 곡식과 기름을 보내도록 하겠다."

  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방의 물이 제법 몸에 맞는지 성년이 지나고도 더 자라 이제 여간한 장정보다도 풍채가 훌륭하다. 기령은 문득 이재의 뺨 위에 가늘게 그어진 상흔에 시선을 두었다. 평소 쉬이 다치는 아우였기에 이마나 뺨에 상처가 생기는 것쯤은 예사였다. 까다로운 여관들마저도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는 것이기에 허투루 넘길 뻔했는데, 밝은 등 아래에서 자세히 보니 상처는 그냥 다친 것이 아니라, 이미 아문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뺨의 상처는 어찌 된 일이더냐?"

  이재는 눈썹을 찡그리며 눈 아래를 문질렀다. 감조차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는 모양에 기령이 손을 들어 가리키자 그제서야 작게 탄식했다.

  "화살에 맞았습니다."

  "화살에 맞아?"

  "이만한 걸로요."

  이재가 엄지와 검지를 펼쳐 화살의 크기를 가늠해 보였다. 기령이 언짢은 기색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이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안면에 불그레한 화색을 띄었다. 이재는 자기로 된 술병을 들어 기령의 잔을 채운 뒤에 제 잔을 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전에 성문 밖으로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영공의 보좌를 받으며 근처를 두루 시찰하였는데, 작은 교전이 일어났지요. 이 흉터는 그때 생긴 상처입니다."

  "독이라도 바른 것이 아닌 이상 흉터를 남길 만한 것은 아니구나. 왕부에는 쓸 만한 의원이 없더냐?"

  "지우고 싶지 않아, 아우가 의원을 물리고 기념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기령이 술잔에서 손을 떼었다. 이재는 대접을 비우고 빈 잔을 탁자 위에 올린 뒤에 금칠로 장식한 오동나무 상자 하나를 가져와 열었다. 붉은 주단으로 덧댄 상자 안에는 긴 끈이 달린 화살 하나가 있다. 기령은 손끝으로 화살을 집어 들었다. 질긴 풀 따위를 꼼꼼하게 엮은 줄이 만지기에 과히 거칠고, 화살대를 이루는 나무의 색이 유달리 짙은 것만 제외하면 평범한 주살이다. 이재가 목소리를 높여 말을 이었다.

  "형님. 그 여자가 주살을 쏘았다는 말입니다. 이 아우를 보고도 조금도 저어하지 않고 시위를 당겨, 고작 물오리나 꿰는 주살로, 이 아우가 고작 하찮은 사냥감이라도 되는 것마냥."

  황통의 드높은 자존심은 결코 모욕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재는 분노하고 있었지만 또한 아주 기꺼운 투였다. 활활 불타는 붉은 눈 속에 담긴 것은 분명한 호승심이다. 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결론에 도달하였고, 그렇게 자존심을 건 결론이라면 이재가 친형처럼 따르는 기령으로서도 물리기 어렵다. 기령은 그 말속에 담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재 속에 묻어 두었던 불씨가 북방의 변경에서 활활 타올라, 이제 강철을 녹이고 검을 벼리는 것이다.

  "아우는 그 여자를 잡아 이 안전에 무릎꿇리기 전에는 수도로 돌아갈 수 없겠습니다."